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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병과 장미꽃

유리에게

오아구2 2021. 4. 20. 19:37

안녕, 유리. 나 지휘사야!

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잘 지내..?
지휘사인 주제에 말재주는 완전 꽝이라서... 이런 중요한 편지에 대고 횡설수설할까 봐 걱정이네.
너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기억 안 나지? 당연히 기억 안날거야. 이번의 네가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헤어졌던 그날 밤이 마지막일 테니까.
나 혼자 세고 있는 날짜긴 하지만, 사실 내가 널 처음 만난 지 오늘로 벌써 400일이야.
네가 이 편지를 받았을 때면 401일, 혹은 402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직도 네가 날 좋아한다고 말해줬던 그 처음의 날을 기억해. 그때 일을 끝내려고 돌아서려는 널 붙잡았었지. 이기적이지만 내 옆에서 사랑을 속삭여 줄 네가 있었으면 했거든. 내게 돌아오지 않을 사랑을 바라만 보는 것에 지쳤었나 봐. 다른 사람에게 주는 만큼의 사랑을 나도 받고 싶었어. 넌 내가 원하는 대로 날 사랑해줬고, 나도 그만큼 널 좋아했지.

그렇게 난 그렇게 네 손을 잡았고 넌 내가 기대한 것보다 많은 것을 줬어. 사랑과 믿음, 용기, 내가 받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점점 네가 아닌 사람이 날 사랑해준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가 없게됐어. 너와 함께 하던 그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아? 네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예정된 이별을 견뎌낼 수 있었어. 눈이 마주치면 늘 웃어줘서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어. 안이 없는 방에서 외롭지 않게 눈을 뜨게 해 주는, 내 옆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네가 있어서 난 그 모든 7일을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두려워지는거야. 달 아래를 날던 너와 내가, 제비꽃 향기가 퍼지는 아름다운 하늘을 바라보며 잠들었던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된다면 어떡하지? 어느 순간 네가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아무 미련없이 날 떠나가겠지. 그럼 난 어떡해? 난 이제 네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난 너와 같지 않아서 널 쉽게 보내줄 수 없을 것 같은데, 난...

유리, 내가 널 많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어. 네가 날 떠나는게 두려워 네 사랑을 밀어내 버린 이번에 말이야.

분명 넌 떠났는데 난 환각을 보고있어. 바스러진 시멘트 가루가 날리고 앙상한 철골 구조만 살아남은 과거의 도시가, 미래의 도시가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아. 결국 무너질 도시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흔적이 너무 많아서 길을 걷는 것조차 너무 힘들어.
네가 없는 7일이 이렇게 긴 줄 몰랐어. 이렇게 보고싶을 줄 알았다면 그냥 그때 네 손을 잡을 걸...

보고 싶어. 다시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내가 후회하길 기다렸다는 듯 창문 밖에서 날아들어와 다시 한번 더 손 내밀어줬으면 좋겠어. 네가 이런 말 싫어한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유리..... 돌아와서 다시 날 사랑해줘...........


난 네가 없는 7일을 보낼 수 없어. 조금만 기다려줘. 다시 널 만나러 돌아갈게.


-지휘사가 보낸 검은 봉투 속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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