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FF14

-

오아구2 2024. 9. 4. 07:15

깜빡.

새벽 6시. 번쩍 뜨인 눈으로 천장을 바라본다. 잠에 든 지 4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피곤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이나 누운 채로 눈을 뜨고 있던 쿠크라는 자고 있는 오르슈팡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품에서 빠져 나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코 끝에 눈 밭의 깨끗하고도 시원한 향이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긴장이 풀린 듯 곤히 잠들어 있는 연인의 얼굴을 보자 새벽에 있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100일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원석들, 서로를 닮은 만년필, 인형과 꽃,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로 가득 채워진 편지까지. 오르슈팡이 정성껏 준비한 선물들을 열어보며 쿠크라는 그저 신나있었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놓인 많은 선물이 다 제 것이라는 말을 들은 어린아이마냥, 상자를 열고 포장을 뜯으며 즐거워했다. 선물을 모두 확인한 뒤, 곱게 인장까지 찍어둔 편지 봉투를 가르고 편지를 꺼냈다. 가장 처음 읽고 싶었던 것을 참았던 건 마지막에 읽어달라는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독 달콤한 말들로 채워진 편지를 두 장 하고도 네 줄 정도 읽었을까, 쿠크라의 손에서 편지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크게 벌어진 입에선 어? 하는 바보같은 소리가 샐 뿐이었다. 믿기지 않는 내용의 편지를 두 번쯤 읽고 쿠크라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 잠깐만 조용히 있어.”
…분명 그건 청혼을 받은 사람이 처음 뱉을 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말을 한 쿠크라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르슈팡은 말을 잘 듣는 연인이었지만, 말을 참 안듣는 애인이기도 했다.
"...."
조용히 내밀어지는 반지와 해바라기 꽃다발, 좋아하는 음식과 로맨틱한 음악까지. 말만 안한다고 조용히 있는게 아니지! 한가득 내밀어진 마음에 쿠크라는 모든 말과 행동을 멈춘 채 자리에 굳어 버렸다. 긴장과 불안으로 떨리는 파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야하는데, 커다란 마음을 꼭꼭 눌러담은 고백에 대답할 말을 쉽게 정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아니, 오늘이려나 같은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좋아 싫어 같은 1차원적인 대답은 하고 싶지 않은데, 머릿속에 진짜? 라는 물음만 가득해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참 이어지는 침묵에 오르슈팡이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안받아줄거야?"
물론 이런 때는 장미가 어울리겠지만, 하며 말 안듣는 애인이 무언가 늘어놓기 시작하자 쿠크라가 고개를 저었다. 오르슈팡, 그만 말해. ...응.

"......."
정말 꿈이 아니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새벽 햇살에, 손가락에 끼워진 언약식 반지를 비추어보며 쿠크라가 코를 훌쩍였다. 지고천의 아침 공기는 차가우니까. ...이제와 청혼이 기뻐서 우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몸을 부르르 떨고 침대에서 일어난 쿠크라가 침대 앞에 놓인 책상으로 다가갔다. 하트가 빼곡히 그려진 달력과 함께 보낸 일상을 적기로 약속한 다이어리가 펼쳐진 채였다. 어제의 일기가 적혔어야 할 페이지는 아무것도 쓰지 않아 텅 비어있었다.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이 감정을 잊을 수 있을리는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벅차는 두근거림을 미래의 자신에게 나눠주고 싶지 않았다. 이건 오직 당신과 지금의 나만이 나눈 감정이어야 한다며 쿠크라가 부린 억지이자 욕심이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던 영웅은 이렇게 점점 욕심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있는 오르슈팡을 바라보던 쿠크라는 펜을 들어 일기장에 그었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길지 않았다.
9월 4일, 내용은 ' — '.





'FF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cm 쿠크라여도 괜찮아!?  (0) 2024.09.18
자립법개론(w.녹차라떼얼음조금)  (0) 2024.09.17
여비별님 타로(성인)  (0) 2024.08.20
50일 편지  (0) 2024.08.11
영원  (0) 2024.06.1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